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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보호에 앞장서는 국민

조선초기의 혼인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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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1 18:13 조회24,6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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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 속에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의 혼례 변천 과정은 타민족과 다른 우리만의 고유한 문화적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적잖게 있습니다.

모계씨족사회에서 부계씨족사회로 고대사회가 변천하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은 독특하게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를 가서 처가살이를 장기간하다가 아이를 낳고 애들이 큰 후에 부인과 애들을 데리고 시집으로 돌아오는 '남귀여가혼'을 전통적으로 지켜온 혼례 풍습이 있었습니다.

동서양 대부분의 나라가 부계씨족 사회를 거쳐 중앙집권적 봉건국가 체제로써 남성위주의 혼인 문화를 발전시켜 갔음에도 우리나라는 모계를 중시하는 혼인풍습을 오랜동안 간직해 왔던 것입니다.
'남귀여가' 혼례풍속은 고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이조 초기 동안 우리민족의 일반적인 혼례문화로 자리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말기 공민왕은 문란해진 왕권강화를 위해 개혁 방안의 필요성을 제기했으며 이는 이제현, 이색, 정몽주 등에 의해 봉건적 신분제도와 가부장제적 종법제도의 합리화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주자학을 도입하게 됩니다. 고려의 뒤를 잇는 조선왕조도 중앙집권적 왕권강화를 위해 정치적 개혁 방안을 마련하였으며 문물제도 정비에 노력하였습니다.

과전제와 노비변정을 실시하고 유교를 숭상하며 불교를 억압하였으며 가묘제를 도입하고 호적제를 개혁하여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사회, 경제, 문화의 개혁시책과 함께 상복제를 개정하고 동성혼을 금지하며 과부의 재혼을 막고 첩의 자식의 신분적 지위를 제한하는 등 가족제도와 관련한 풍습이 전면적으로 정비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가족제도의 개정을 위해 논의된 것이 '주자가례'의 '친영론'입니다.

'친영론'은 '여자가 남자 집으로 시집을 와서 사는 것'으로써 혼례 장소와 혼례 후 두 집안간의 지위에 따른 문제입니다. 즉, 조선초기의 논쟁의 요점은 재래의 남귀여가(서류부가)혼례 풍속을 친영(우귀)혼속으로 바꾸자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단순히 혼례 절차의 변경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에 대한 개혁파들의 정책의 단면이라 하겠습니다.

조선초기 개혁파 공신인 정도전, 권근 등에 의해 '친영론'은 적극적으로 지지되었으나 가부장권에 의한 재산의 상속과 제사권의 상속이 사회적 이해 관계로 걸려 있는 '친영론'은 일반 사대부들의 소극적 태도에 의해 사회 전반적으로 보급되지는 못하였고, 일반 대중은 이를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환영 받지도 모한채 잊혀져 간 것입니다.

그 후 친영론 제기 시점부터 중종 때까지 약 100년간은 친영론이 사대부 지배계급의 냉대를 받았으나, 15세기 말 16세기 초 성종과 중종의 시기를 거치면서 사림파 양반과 훈구파 양반간에 친영론이 정권쟁탈전의 중요한 논쟁이되어 중종시대 조광조 일파에게 사화의 참극까지 빚어지는 사태를 불러일으킵니다.

그 후 중종 때인 1512년 7월 중종 자신이 태평관에서 제2비를 친영례로 맞이하는 실행까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대부 가정과 일반 민간에서는 친영을 실시하지 않았고, 이 시기에 편찬된 예서에서도 친영례를 얘기하고 있으나 실행한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결국 명종(1546 - 1567 )때 재래의 '남귀여가' 혼속과 '친영'을 절충한 '반친영' 움직임이 일어나 '예식은 처가(여가)에서 거행하지만 여가의 체류 기간을 줄여 삼일만에 친영의례를 거행하는 이른바 '반친영' 의례를 치루었으며 이는 문정공 조식이 주자가례 원형대로 친영례를 실행하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형편을 헤아려 만들었다고 전해져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대부의 혼례 풍속은 주자가례를 좇되 '반친영'을 거행하는 여가를 존중하고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는 아름답고 현실적인 독특한 혼례 풍속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풍습은 각 지역에 통일되게 전파되지 못하여 지역별로는 '남귀여가' 혼속을 따르거나, 혹은 '친영례'를 따르는 식의 속례가 가미된 가가례가 존재하게 됩니다.

ⓟⓢ : 이처럼 오랜동안 우리나라의 혼례 풍습은 가족제도의 변천과 맞물려 신중하고 엄격하게 변화하여 왔으나 일제시대와 6.25동란, 서구화된 가정의례 준칙법안 등을 거치면서 현대에는 불분명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7-2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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