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마당

역사칼럼

문화재 보호에 앞장서는 국민

한국의 선불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6-07-28 16:54 조회27,429회 댓글0건

본문

한국의 선불교 전통

한국에서 수행생활을 하고 있는 외국 승려에게 서구사회에서 불교신자가 급증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서구인들이 현대문명에서 느끼고 있는 허무감 때문이죠. 미국인, 특히 젊은이들은 성 개방 풍조와 여행 등을 통해 무한한 자유를 경험하며 현대문명의 혜택을 최고조로 누려 왔습니다. 그러나 자유의 끝에서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내 마음은 무엇인지\'라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없어 그들의 마음은 뻥 뚫려 있죠.\"고 대답했다. \'자신이 누구인가\'하는 물음은 자아상실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선불교는 그 흔들림의 중심에서 지혜의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그 선불교의 흐름이 한국에서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한 번 살펴보자.

[1] 선종의 법맥

불교는 크게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구분된다. 교종은 부처의 가르침, 즉 불경에 기록된 부처의 설교와 그에 대한 주석들에 근거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파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선종은 언어의 제약을 뛰어넘고(不立文字), 가르침 너머에서 전해오는(敎外別傳) 진리를 몸으로 추구하는 종파이다.

중국선종은 6세기 경에 인도의 보리달마에 의해 처음 유입된 이후, 혜가 -승찬-도신을 거쳐 홍인을 기점으로 신수의 북종과 혜능의 남종으로 나뉘어진다. 신수의 북종은 오래지 않아 법맥이 끊어지고, 혜능의 남종만이 번창해 5가(家) 7종(宗)을 내었고, 원나라, 명나라 때에 이르러 다른 종파들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으나, 남종만은 오히려 번성했다.
< 헤능과 신수 : 중국 선종의 다섯 번째 큰스님인 홍인(弘忍)은 제자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일갈하고 게송을 지어 바치게 했다. 덧붙여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 자신의 법통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수제자였던 신수(神秀)는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바쳤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 늘 깨끗이 털고 닦아서, 먼지가 달라붙지 않도록 해야지.\" 홍인의 눈에 신수의 게송은 덜 익은 과일에 불과했다. 방앗간에서 일하다가 신수의 게송을 가지고 예불을 드린다는 말을 들은 혜능(惠能)은 그곳에 참여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게송을 읊조렸다. \"깨달음은 본시 나무가 아니고, 밝은 거울에는 받침대가 없다. 본래 아무것도 없거니, 어디에 먼지가 앉을 것이랴.\" 중국선종의 법맥은 이렇게 홍인에서 혜능으로 넘어갔다. 혜능은 자신을 시기하여 해치려는 사람들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가 남선종의 맥을 열었고, 신수는 북선종을 열었다.>
한국에 유입된 선종의 초기 흐름은 두 갈래이다. 하나는 중국선종의 4조 도신(道信)의 법을 받고 귀국한 법랑(法朗), 그리고 그의 제자 신행(愼行)이 당나라에서 북종의 지공(志空)으로부터 법을 받고 귀국해 남악(현재의 지리산) 단속사(斷俗寺)를 중심으로 선법을 전개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남종의 지장(智藏)의 법을 이어 귀국한 도의(道義), 홍척(洪陟), 혜철(慧徹) 등 조사선(祖師禪)의 흐름이다.
신라시대 선불교의 특징은 \'북산의 남악첩\'(北山義 南岳陟)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북산은 설악산을 의미하는데, 도의가 이곳의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간 일을 말한다. 또한 남악이란 지리산으로 홍척이 남원 실상사(實相寺)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산의 남악첩\'은 당시에 유행하던 화엄계 일색의 교종불교와 경쟁관계를 띠면서 새로운 불교의 흐름을 펼쳐 놓았다. 이들과 함께 신라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선불교가 부흥되기 시작한 것이다.
신라에서 골격을 갖춘 교종과 선종의 두 흐름은 불교문화를 꽃피운 고려시대에 하나의 물길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선교화회(禪敎和會)의 움직임은 의천이 천태종의 교학을 중심으로 선종과 융합을 시도한 데서 발견된다. 이런 의천의 활동에 영향을 받아 선종에서도 교종과 화회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특히 희이자(稀夷子), 학일(學一)은 선 수행에서 출발해서 다양한 교학을 거쳐 다시 선으로 돌아가는 입장에서 선교화회를 시도했다.
본격적인 선교화회는 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를 통해 전개되었다. 정이란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조용하게 만드는 것이고, 혜는 사물을 사물대로 보는 것으로 교학의 덕목이다. 지눌에게 정과 혜는 둘로 분리되지 않고, 마음의 두 측면이다. 정은 마음의 공적한 본체를 가리키며, 혜란 마음의 신령스런 인식 작용이다. 따라서 혜와 정은 마음의 본체와 작용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정에만 치우치면 혼미한 정신상태에 빠지기 쉽고, 혜에만 치우치면 산란해지기 쉽기 때문에 항상 정과 혜를 함께 닦으라는 것이다.
지눌은 정혜쌍수과 함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제시한다. 돈오란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 밖으로 치닫던 생각을 거두어 자신의 내면을 향할 때 참다운 나, 참 마음의 실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망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눌이 보기에 수행은 깨달음의 획득에서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돈오가 자기 존재를 명료하게 깨달은 것이라면, 점수는 그 앎이 생활 속에 실천하는 것이다.
지눌의 불교사상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은 간화선(看話禪)이다. 한국에 최초로 간화선을 도입한 지눌은 돈오점수가 교학에 근거해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라면, 간화선은 화두를 방편으로 근본적인 물음을 파헤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다. 간화선은 오늘날까지 한국 선불교의 기본 뼈대를 이루고 있다.

지눌에 의해 도입된 간화선은 자연스럽게 조사선(祖師禪)으로 이어진다. 조사선은 경전이외에 조사들이 전수한 가르침을 근기로 삼는 수행법이다. 조사선의 이론적 발전에 영향을 미친 천책(天 )은 {禪門寶藏錄}을 통해 석가의 스승이었던 진귀(眞歸)조사가 깨우치게 했다는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사상은 조선시대의 서산휴정(西山休靜)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휴정은 경전이란 입문에 불과하고, 선이야말로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면서, \'교학을 버리고 선에 들어갈 것\'(捨敎入禪)을 주장했다. 제자들이 휴정이 머물고 있던 금선대(金仙臺)로 {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를 가지고 와서, 금강경을 선종의 중심사상으로 삼아야 되는지를 물었을 때, 휴정은 \"석가가 정법안장을 가섭에게 전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금강경을 가섭에게 전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면서 반대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의 선불교의 흐름은 경전이나 문자를 경시하는 방향으로 변해 갔다.
<구산선문: 신라시대의 초기 선불교를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구산선문은 가지산의 도의, 실상산의 홍척, 동리산의 혜철, 사자산의 도윤, 성주산의 무염, 봉림산의 현욱, 도굴산의 범일, 희양산의 지선, 수미산의 이엄 등을 말한다. 그러나 구산선문에 포함되지 않은 선문도 있고, 또한 고려시대에 개산된 것도 있기 때문에 신라시대의 선불교를 \'구산선문\'에 국한해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산선문은 초기 선불교의 수를 의미한다기보다 다양한 선풍을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가섭: 석가모니가 영산의 법상에 올라 꽃 하나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다들 의아하게 좌우를 둘러보는데, 오직 한 사람, 가섭(迦葉)만이 조용히 미소지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교외별전과 불립문자를 내세우는 선불교의 효시가 가섭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근대 한국 선불교

근대 한국 선불교는 경허(鏡虛)선사를 시작으로 용성(龍城), 만공(滿空), 한암(漢巖) 등으로 전개되어 왔다. 만공은 계율 중심의 선불교를 제시했던 백파(白坡)를 비웃으면서, 간화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데는 계도 없고 율도 없다면서 정혜를 중심으로 한 선불교의 흐름을 형성했다.
용성은 16세에 해인사에 출가한 후에 47세 때까지 산문을 떠돌며 깨달음을 추구했다. 오랫동안 수행과 선지식을 통해 진리를 추구했던 용성은 한일합방이 체결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왔고, 다음 해에는 종로구 봉익동에 대각사를 창건했다. 대각사는 단지 선도량의 구실만 한 것이 아니라, 한용운 등 많은 선각자들이 민족의 장래를 논의하던 곳이기도 하다. 용성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3.1운동에 가담해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룰 만큼 민중의 삶에서 불법을 실천하고자 했다.
민족지도자로서 용성은 불교 자체의 정화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대각교운동\'을 전개하면서, 경전번역, 선의 대중화, 항일운동, 교단의 정화작업, 사원경제의 자립화, 포교의 현대화 등을 중점 사업으로 삼았다. 특히 그의 역경사업은 한국 불교사의 한 획을 긋는 사업으로 평가된다. 그의 한글 역경사업은 서대문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글성경을 읽고 있는 점에 자극을 받고, 불경의 한글 번역이 필요하다고 느낀 데서 비롯한다. 그는 일반 대중이 경전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은 한문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선글 화엄경} 서문에서 그는 \"조선인에게는 조선글, 조선말로 번역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역경사업은 {화엄경}을 위시하여 30여종에 달한다.
만공은 14세에 경허를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승이 되었다. 만공의 선사상은 \'나 찾기\'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나를 찾는 이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서 사는 것이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허망한 자아가 참된 자아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하나 자기를 모르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선불교의 방향을 참된 나 찾기로 이끌었다.
만공의 선사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에게 \'나\'에 대한 깨달음은 개인의 지혜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사람을 구하는 자비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온 세계가 한 송이의 꽃\'(世界一花)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지구라는 한 모태에서 같이 출생한 동포가 서로 총칼을 겨누게 되니, 어느 형을 찌르려고 칼을 갈며, 어느 아우를 죽이려고 총을 만드는지 비참한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세계의 갈등과 전쟁을 개탄하기도 했다.
경허의 제자인 한암은 세상에서 떨어져 수행과 수계(守戒)에 정진했던 인물이다. 그는 1899년 스물 넷의 나이에 경북 성주(星州)에 있는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를 만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인 \"세상에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모습이 형상 없음을 보면 곧 여래를 본 것이로다\"라는 경허의 말을 듣고 깨달음의 단초를 얻었다고 한다.
그 후 한함은 통도사, 봉은사 등에서 조실(祖室)로 있다가, 51세에 오대산 월정사 상원암으로 들어가 26년 동안 외출을 금하고 수행에 전념했다. 그는 월정사에 들어 갈 때 \"천고에 자취를 감은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본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