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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李奉昌)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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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2 17:13 조회27,2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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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李奉昌)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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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8. 10~1932.10.10



<주요공적>



·1931년 상해에서 김구선생과 거사 준비


·1932년 일왕에게 수류탄 투척, 사형 순국






1931년 1월 2일의 중국 상해의 날씨는 유난히 추웠다.

대륙을 휩쓸고 있던 반제국주의와 시민혁명의 열기도 식어가는 듯 했다.
국제정세도 그러했다.
제국주의자들의 횡포 앞에 피압박민족들은 자기 나라에서도 기를 펴고 살 수가 없었다. 「거인(巨人)」중국이 그러할 때 이미 일제에 먹힌 대한(大韓)은 말할 나위 없었다.

상해 프랑스 조계 보창로 309호 소재한 우리의 임시정부는 당시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두가지 운동노선을 겨우 접목시켜 기틀을 잡았으나 뚜렷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침체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열조짐까지 나타나 독립운동은 생기와 역동성을 잃고 있었다.



임정(臨政) 직원도 오인



이동녕(李東寧) 선생이 동료 국무원들과 함께 김구선생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백범은 어찌하여 우리 한국인인지 일인인지 모르는 자를 임정 건물에 출입시키도록 놔두고 있습니까?』

『…』

『그 자는 하오리를 입고 게다짝까지 신고 있지 않습니까?』

백범 김구선생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한 채 검정색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창밖의 바람이 잠시 가쁜 숨을 멈춘 사이, 백범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현재 그 젊은이를 조사하고 있으니 저에게 맡겨두시지요.』

임정 국무원 회의실에서 독립운동지도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된 이 젊은이는 한국태생을 일인(日人)을 양부(養父로 두고 일인 행세를 하는 기노시라 쇼죠(木下昌藏)로 밝혀졌다. 일국(日國)에서 상해로 건너올때도 이같은 일본식 이름을 썼다.

기노시타 쇼죠. 상해 양수포(楊樹浦) 소재 일인 인쇄소 점원, 나이 31세.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



적괴수 처단 자원



이것으로 겉으로 드러난 이봉창 선생의 모습이었다. 고향인 서울에서 철도원이라는 중노동에 시달리며「조센징」이라는 설움을 받다가 대륙으로 이주한 젊은이.
한·일합방 이후 이 땅의 대부분 청년들이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던 상황을 현대화된 1990년대에 사는 우리가 짐작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봉창의사는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효녕대군(孝寧大君) 후손인 부친 이진규(李鎭奎)씨와 모친 밀양 손씨(密陽孫氏) 사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게 되었고, 자리를 옮겨 남만(南滿)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을 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로부터「조센징」이라는 참을 수 없는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여기서 선생은 부모나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세월이 지나면서 선생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침략괴수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의거는 피지배민족이 정복민족의 수괴를 처단한 의거임을 깨닫게 됐다. 안의사의 비장한 구국정신이 선생의 어린 가슴을 흥분께 했다.



철저한 일본인 행세…거사준비에 1년 걸려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한 그는 철도원 생활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일어(日語)를 익히는 한편, 상점점원이나 철공소직공·잡부역·날품팔이 등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일인생활을 익혔다.

그러나 선생은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6년여의 ‘일본습득(日本習得)’을 마친 후 독립운동 본거지인 상해로 옮겨왔다.
능숙한 일어를 바탕으로 일인상점에 치직, 임정청사와 거류민단 출입의 기회를 잡는다.
당시 임정정부 직원들이 기노시타라는 일인식 이름을 쓰는 한국인을 의심한 것은 당연한 일.
그같은 사실이 백범에게 전해진 것은 어찌보면 필연적 만남 같기도 하고, 역사적 우연처럼 비치기도 한다. 백범은 임정사무원인 김동우(金東宇)를 시켜 선생을 면밀히 관찰했다.



상해임정서 백범 면담 독립사상에 큰 감명



선생이 단순한「건달」이 아님을 간파한 백범은 여러 차례 비밀리에 면담을 갖는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백범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는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 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해로 온 것입니다. 저로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세상이 놀란 장거(壯擧)



거사준비에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백범이 자금과 수류탄을 준비하는 동안 선생은 일인철공소에서 일하며 술과 음식으로 일경과도 교제를 하면서 할 수 없는 건달행세를 했다. 일제 영사관도 자유롭게 출입했다.

백범은 1931년 12월 13일 선생을 안중근의사 아우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으로 데려가 선서식을 거행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가슴에 새긴 큰 뜻 못이루고 日감옥서 순국…46년 효창공원에 안장



일인을 가장하고 12월말 일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 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해이 백범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암호전보를 보냈다.

1932년 1월 8일. 예정대로 수류탄은 히로히토를 향해 던져졌으나 불행히도 명중되지 못하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만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선생의 장거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전선에는 새로운 활력소를 작용했다. 일국(日國)이 일으킨 소위「만보산(萬寶山)사건」으로 야기된 한·중 양국민간의 감정대립도 깨끗이 씻는 계기가 되었다.

의사는 32년 10월 10일 일제에 의해 사형을 받아 시곡(市谷)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선생의 유해는 46년 7월 고국으로 모셔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7-2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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