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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의 파수꾼 - 양만춘(楊萬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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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2 17:05 조회10,1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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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양만춘(楊萬春) <br> <br>

■ 생몰년 미상 <br>

■ 고구려의 명장</b> <br><br><br>

▶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의 성주 <br>
그는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 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 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밝히고 있다. <br>
어떻든 그는 지금의 만주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방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소재한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군사들 또한 정예한 것으로 정평이 난 바 있다. <br>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정변에 의한 정권장악에도 불구하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br><br>

▶ 당나라 태종과의 공방과 일화<br>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을 받은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撫順부근)과 비사성(卑沙城: 大連灣 北岸)이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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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당나라 태종의 독전(督戰)으로 요동성(遼東城: 遼陽)과 백암성(白巖城:遼陽 동남)도 당나라군대에 함락되었다. 당나라군대는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李世勣)의 건의가 채택되어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br>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군대에 포위된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15만 병력이 출동하였으나 안시성 근처 8리 지점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안시성은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였다. <br>
안시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나라군대는 공격목표를 그보다 훨씬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만주 鳳凰 남쪽의 高麗山城)으로 변경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당나라군대는 연인원 50만명이 동원되어 60여일 걸려서 높은 흙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br>
당시 당나라군대는 하루에도 6·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하여 총공세로 나왔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기후가 추워지기 시작하였고, 군량 또한 다하였으므로 당나라 태종은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그는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하니, 당나라 태종은 그의 용전을 높이 평가하여 비단 100필을 주면서 왕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 <br>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 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 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한 것으로 적고 있다.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에 반대하여 끝까지 저항한 11성(城)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된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려 준다. <br>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7-28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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