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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례의 상징체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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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1 17:45 조회29,3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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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례의 상징체계 연구




(한국종교학회, ꡔ종교연구ꡕ 18집, 2000)







1. 서론

2. 국가의례의 역사적 변화

1) 조선시대의 국가의례

2) 대한제국기와 일제시기의 국가의례

3) 대한민국과 국가의례

3. 국가의례의 체계

1) 정부의전

2) 국립묘지

3) 국경일 규정

4. 국가의례와 상징물

- 국기, 국가, 국화, 국립현충원

5. 결론













1) 조선시대의 국가 예전과 ꡔ국조오례의ꡕ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하였던 조선시대에 행해진 국가적인 예전들이 어떤 것이었고, 그 성격은 어떠했는지는 ꡔ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ꡕ에 잘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조선 시대는 예(禮)를 사회생활의 기본 질서로 인식하는 유교사회였기 때문에 예전은 마땅히 준수해야 하는 기본법과 같은 것이었고, 이에 철저히 준수해야 하는 규범집으로서 ꡔ국조오례의ꡕ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ꡔ국조오례의ꡕ의 구성 체계와 내용을 살펴보면 근대적 국가체계로서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이전의 전통 사회에서 국가적인 차원의 예전이 어떻게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두환(1985)과 이범직(1989, 1991)의 연구 외에는 기존 연구가 전무하다시피 하며, 이 역시 개괄적인 수준이거나 길례(吉禮)나 가례(嘉禮) 등 부분적인 예식만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보다 많은 연구가 요망되는 분야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조선시대에 규정되어 있던 국가적인 예전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소개하는 수준에서 ꡔ국조오례의ꡕ를 개괄하고자 한다.

먼저 ꡔ국조오례의ꡕ의 편찬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ꡔ주례(周禮)ꡕ의 오례체제(五禮體制)에 기반한 유교적인 오례가 왕실의 예전으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와 민간신앙적 요소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서 본래 ꡔ주례ꡕ에서 규정한 오례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려의 왕실이 오례 가운데 자신들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수용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왕례를 오례의 체제로 정리한 ꡔ고려사(高麗史)ꡕ 「예지(禮志)」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고영진 1996: 32)

그런데 조선 왕조가 수립되면서 고려 왕조와의 차별성을 분명히 하고 아울러 중앙권력의 확립과 유교적인 의미에서 예교질서의 확립을 위해 예전을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태종대에 명의 ꡔ홍무예제(洪武禮制)ꡕ를 기본으로 한 개정 노력이 이루어졌으나, 국가의 기본 예식으로서 오례, 즉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에 대해 규정한 예전을 편찬하도록 최초로 명한 것은 세종이었다. 이에 허조(許稠) 등이 고금의 예서와 ꡔ홍무예제ꡕ 등을 참작하고 ꡔ두씨통전(杜氏通典)ꡕ을 모방하여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러자 다시 세조가 강의맹(姜希孟) 등에게 명하여 오례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고, 또 도식을 붙여 편찬하게 하였으나 탈고하지 못하였으나, 그 뒤 성종 5년 1474년에 신숙주(申叔舟)와 정척(鄭陟) 등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오례의서(五禮儀序)에 의하면, “ꡔ두씨통전ꡕ과 중국의 여러 예제와 우리나라 전래의 속례(俗禮)를 가감하여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시행되기 전에 세종이 승하하고 그 뒤에 세조가 이를 편찬하였던 바, 그 조문이 너무 호번하고 앞뒤에 어긋난 것이 있으니 법을 삼을 수가 없다”고 하고, “다시 수정 찬술하게 하였으나, 탈고하기 전에 세조 또한 죽고 예종을 거쳐 성종이 뒤를 이어 완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ꡔ국조오례의ꡕ의 순서는 길․가․빈․군․흉례의 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ꡔ주례ꡕ의 길․흉․빈․군․가례의 순서나, ꡔ고려사ꡕ 「예지」의 길․흉․군․빈․가례의 순서와 달리 ꡔ두씨통전ꡕ에 실린 ꡔ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ꡕ와 ꡔ송사(宋史)ꡕ 「예지(禮志)」와 같은 순서이다. 그러므로 ꡔ국조오례의ꡕ는 이전의 예전과는 달리 당송의 제도를 많이 참작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ꡔ국조오례의ꡕ 속에는 왕실 행사용 예전 외에 사대부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예규인 ‘대부사서인사중월시향의(大夫士庶人四仲月時享儀)’와 ‘대부사서인상의(大夫士庶人喪儀)’ 항목이 함께 들어 있다. 또한 ꡔ국조오례의ꡕ에는 ‘주현포제의(州縣酺祭儀)’․‘주현여제의(州縣厲祭儀)’ 등 주현(州縣)의 의식과 ‘향음주의(鄕飮酒儀)’․‘향사의(鄕射儀)’ 등 향촌의 의례까지 포함되어 있다. 결국 ꡔ국조오례의ꡕ는 그 체계 속에 왕실 의례뿐만 아니라 사대부와 일반인의 의례도 포함하고 있으며, 지역적으로도 서울뿐만 아니라 주현과 향촌의 의례도 포함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고영진 1996: 33-4) 이것은 ꡔ국조오례의ꡕ가 ꡔ경국대전(經國大典)ꡕ과 더불어 조선시대 국가의 기본적인 예전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준다.

ꡔ국조오례의ꡕ의 구성은 예식의 종류별로 되어 있는데, 길례는 권1개에 30개조, 권2에 26개조로 되어 있고, 가례는 권3에 21개조, 권4에 29개조로 되어 있으며, 빈례는 권5에 6개조로 구성되었고, 군례는 권6에 7개조로, 흉례는 권7에 59개조, 권8에 32개조로 되어 있다. 길례는 주로 사직(社稷)․종묘(宗廟)와 각 전(殿) 및 산천 등 국가에서 제사드리는 의식을 담고 있는데, 권2의 26개조에는 주로 농사와 관계되는 의식인 선농(先農), 선잠(先蠶), 기우(祈雨), 석전(釋奠), 사한(司寒) 등을 국가적 예식을 규정하고 있다. 가례는 중국에 대한 사대례(事大禮)와 명절과 조하(朝賀) 그리고 납비(納妃), 책비(冊妃) 등 궁중 가례절차와 의식, 그리고 세자, 왕녀, 종친, 과거, 사신, 외관(外官) 등에 관한 의식을 담고 있다. 가령 양로연(養老宴)과 같은 것은 예조에서 주관하여 노인을 모아 잔치를 베푸는데, 임금이 친히 참여하여 양로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왕실의 혼례는 ꡔ사례편람(四禮便覽)ꡕ의 기재내용과 비슷하다. 빈례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의식인데 총 6개조로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사대의식과 일본․유구 등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의식이 각각 따로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군례는 말 그대로 군대에 관한 의식인데, 친사(親射), 열병(閱兵), 강무(講武) 등에 대한 7개조의 의식절차를 규정해놓고 있다. 흉례는 국장에 관한 모든 의식절차들과 국왕 이하 궁중의 초상 이후의 모든 의식절차들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그리고 권말에는 사대부와 일반 백성의 상장례 의식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다.

이하에서 설명할 일제시대의 국가 예전이나 대한민국의 국가 예전과 비교하기 위해서 국상(國喪)에 대한 ꡔ국조오례의ꡕ의 규정만을 잠깐 살펴보자. ꡔ국조오례의ꡕ에서 왕이나 왕후, 왕대비의 초상을 말하는 국상은 일반적으로 흉례에 속하며 3단계로 나누어진다. 제1단계는 국휼고명에서 상복을 입는 성복까지이며, 제2단계는 성복 후부터 상여를 장지로 옮겨 하관하고 봉분을 세우는 천전까지의 과정이다. 이 두 단계를 국장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제3단계는 반혼(返魂)에서 우제(虞祭), 졸곡(卒哭)을 거쳐 상제(祥祭)와 담제(禫祭), 제복에 이르는 과정인데 일반적으로 이는 제례로 오인되기도 한다.

ꡔ국조오례의ꡕ에서 규정하고 있는 성복까지의 절차는 모두 24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지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다.




국휼고명(國恤顧命): 왕이 위독하면 평소 정사를 돌보던 곳으로 모셔와 기대어 앉게 하고 왕세자가 옆에서 모시고 대신과 근시들이 자리를 정한 후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초종(初終): 병이 심하면 내시가 부축하여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네 사람이 그 손발을 잡는다. 새 솜을 입과 코 위에 대어 움직이는가를 본 후 숨이 끊어지면 곡을 한다.

복(服): 내시가 임금의 웃옷을 가지고 지붕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상위복(上位復)’을 세 번 부르고 옷을 앞으로 던지면 곁에서 받아서 함에 넣어 가지고 들어와 왕의 시신을 덮는다.

역복불식(易服不食): 왕세자 이하 모두가 관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흰옷과 흰신 그리고 거친 베로 된 버선을 신은 다음 3일 동안 음식을 들지 않는다.

계령(戒令): 5일간 시장을 철시하고 졸곡(卒哭)까지 음악과 결혼과 도살을 금한다. 그리고 이조에서는 초상을 집행할 관원과 관장할 업무를 정한다.

목욕(沐浴): 내시들이 왕의 시신을 목욕시킨다.

습(襲): 내시들이 왕의 시신에 옷을 입힌다.

전(奠): 예찬(禮饌)을 갖추어 술잔을 드린다.

위위곡(爲位哭): 내시들이 왕세자, 대군, 왕비, 내명부인, 왕세자빈 등의 위(位)를 마련하면 각자의 위에 나아가 곡을 한다.

거림(擧臨): 전의(典儀)가 종친과 문무백관들의 자리를 바깥 뜰에 설치하되 문관은 동편에, 무관은 서편에 마련하여 모두 곡하고 네 번 절을 한다.

함(含): 사도시(司䆃寺)에서 쌀을 바치고 상의원(尙衣院)에서 진주를 바치면 내시가 이를 시신의 입에 넣어준다.

설빙(雪氷):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나무틀을 짜서 얼음을 넣어 시신의 사면을 둘러싼다.

영좌(靈座): 교의(交椅)를 시신 앞에 있는 상 위에 남향으로 놓고, 내시가 혼백(魂帛)을 만들어 교의에 안치한다.

명정(銘旌): 붉은 천에 금박으로 ‘대행왕재궁(大行王梓宮)’이라고 써서 영좌의 오른편에 둔다.

고사묘(告社廟): 제3일째 되는 날에 대신을 보내어 사직과 영녕전 그리고 종묘에 고한다.

소렴(小殮): 베로 시신을 싸서 묶는다.

전(奠): 소렴 후에 예찬을 갖추어 전을 드린다.

성빈(成殯): 선공감에서 정전의 약간 서편에 빈소를 차린다.

전(奠): 성빈 후에 다시 예찬을 갖추어 전을 드린다.

여차(廬次): 선공감에서 중문 밖에 의려(倚廬)를 만들어 왕세자 이하 대군들이 머물러 하고, 내시들이 왕비 이하 왕세자빈, 내명부들이 머물도록 별실에 의려를 마련한다.

성복(成服): 왕세자 이하 모두가 상복으로 갈아 입는다.




그리고 국장의 제2단계인 성복이후 천전까지는 모두 16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




복제(服制): 성복에 따른 상복의 규격과 상기(喪朞)를 정한다.

사위(嗣位): 성복례가 끝나면 왕의 자리를 비워둘 수가 없기 때문에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한다.

반교서(頒敎書): 왕위에 오른 뒤 그 사실을 교서로 대내외에 알리고 국정을 처리한다.

고부청시청승습(告訃請諡請承襲): 외국에 사신을 보내어 국상을 알린다.

조석곡전급상식(朝夕哭奠及上食): 매일 새벽과 저녁에 예찬을 갖추어서 잔을 드리고 곡을 한다.

삭망전(朔望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빈전에서 예찬을 갖추어 잔을 드리고 곡을 한다.

의정부솔백관진향(議政府率百官進香): 날을 받아 의정부에서 영의정이 모든 관료들을 인솔하고 분향하여 고결한다. 이 때 종친부와 의빈부, 그리고 외관들도 각각 별도로 분향하고 고결한다.

치장(治葬): 상을 당한 지 5개월이 되면 장사를 지내게 되는데, 지관을 시켜 능터를 잡고 날을 받아 광중(壙中)을 판다.

청시종묘(請諡宗廟): 예조에서 시호를 의논하여 정한 뒤 종묘에 들어가 선왕들의 위패에 시호를 의논한 경위와 결정된 사유를 고유하여 대행황의 시호를 확정한다.

상시책보(上諡冊寶): 종묘에 시호를 고유한 뒤 빈전에서 상시(上諡)의 예를 행한다.

계빈(啓殯): 발인하기 위한 준비로 발인하기 전날 빈전의 문을 열고 관을 닦고 점검한다.

조전(祖奠): 발인하기 위하여 빈전에 설상을 하고 예찬을 갖춘 뒤 왕이 친행하여 배곡하고 술을 올려 발인할 것을 고하고 관을 상여로 옮긴다.

견전(遣奠): 관을 상여로 옮기기 전에 중문 밖에서 상여로 옮긴다는 사유를 고한다.

발인(發引): 관을 상여로 옮기고 빈전을 출발하여 묘지로 향하는 절차.

노제(路祭): 상여를 운반하는 중로에 도성을 떠난다는 고유로 4대문 밖에서 행한다.

천전(遷奠):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여 관을 현궁(玄宮)으로 운반하여 하관하고 성분하는 과정이다.




ꡔ국조오례의ꡕ에 기재된 조선시대 국가 예전을 종합적으로 보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까지는 일정한 준칙이 없이 고유 의식과 불교, 유교의 의식이 혼합된 형태로 존재하였던 것이 조선시대의 ꡔ국조오례의ꡕ에 와서 유교적 예식을 바탕으로 한 예교질서(禮敎秩序)로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산천제나 기우제와 같이 토속적인 성격이 강한 의례들도 ꡔ국조오례의ꡕ에서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하여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어 유교적 요소가 많이 가미되었던 것이다.




2) 개항기 및 일제 시기의 국가 예전




유교 질서를 중심으로 예교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상을 예전적인 차원에서 확립한 것이 조선 시대의 오례체제와 ꡔ국조오례의ꡕ였다면, 유교적 사회 질서가 해체되고 일제에 의한 식민화와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예교주의적 국가 예전은 더 이상 존속할 사회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 추이는 이미 갑오 개혁 당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중국의 제후국으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각종 예전들을 제후의 예가 아니라 황제의 예로서 바꾸고 원구단에서 천제를 올리는 한편, 서구의 법식을 본받아 관제와 복제를 변경하면서 전통적인 조선시대의 국가 예전은 그 원형적인 틀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국가 예전의 모델로 다시 탄생하였다. 말하자면 형식적으로나마 자주적인 근대 국가로서 대한민국을 건설하면서 완전히 전통적인 예전의 모델에서 벗어나 근대 공화국의 이념에 부응하는 현대적인 국가 예전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항기와 일제 시기에 행해진 국가 예전은 해방 이후 현대적인 국가 예전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단계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개항기와 일제 시기의 국가 예전에 대해서는 아직 전면적인 연구가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1926년 4월 25일부터 6월 12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일본의 국장 형식을 가미한 것으로 평가되는 순종황제의 국장(國葬)만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조선박문사 1926: 102-158; 장철수 1995: 213-232에서 재인용)




4월 25일(음 3월 14일) 상오 6시 15분에 창덕궁(昌德宮) 흥복헌(興福軒)에서 왕비전하와 민영기(閔泳綺), 이지용(李址鎔), 민영찬(閔泳瓚), 엄윤섭(嚴允燮), 김영갑(金永甲)과 여관(女官) 김충연(金忠淵), 천일청(千一淸) 등이 임종을 지킨 가운데 순종 황제가 승하하였다. 오후 5시에 빈전(殯殿)으로 설정된 대조전(大造殿) 동온돌(東溫突)에 이봉(移奉)하고 수렴식(收斂式)을 거행하고 비단 이불을 덮어 드린 후 영대(靈臺)에 봉어(奉御)하고 양촉(洋燭)을 켜고 빙(氷)을 설하였다.

이 날 결정되어 진행된 승하일에서 성복일까지의 의식절차는 다음과 같다.




수렴(收斂) 4월 25일 오후 5시

복(復) 4월 25일 오후 9시

고묘전(告廟殿) 4월 27일 오전 10시

목욕(沐浴) 4월 27일 오후 1시

습(襲) 4월 27일

설영좌(設靈座) 4월 27일 오후 2시 30분

습전(襲奠) 4월 27일 오후 3시

입명정(立銘旌) 4월 27일

소렴(小殮) 4월 27일 오후 4시

소렴전(小殮奠) 4월 27일 오후 5시 30분

내재궁배진(內梓宮陪進) 4월 28일 오후 2시

영상이봉(靈床移奉) 4월 29일 오후 1시

대렴(大斂) 4월 29일 오후 2시

대렴전(大斂奠) 4월 29일 오후 3시

봉하재궁(奉下梓宮) 4월 29일 오후 4시

성빈(成殯) 4월 29일 오후 5시

성빈전(成殯奠) 4월 29일 오후 5시 30분

성복(成服) 5월 1일 오후 1시

성복전(成服奠) 5월 1일




그리고 1926년 5월 2일부터 순종황제의 인산일인 6월 10일까지 각 예식 절차들도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고종황제의 장례 예식대로 진행하였다. 그런데 5월 1일에 동경의 총리대신 관저에서 열린 국장위원회가 8개항의 사항을 결정하였는데, 그 중 제2항에서 “國葬形式은 賜誄의 儀를 除外한 外에는 純全히 朝鮮 固有의 式으로 할 일”이라고 정하였다. 그리고 5월 9일에 동경에서 서울로 온 국장위원 일동은 창덕궁에서 이왕직과 국장형식을 의논하면서 순조선식으로 인산의식의 절차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이는 일제 시대에 들어와서 ꡔ국조오례의ꡕ의 국가 예전들이 길례나 빈례, 군례 등의 경우에는 대다수 폐지되었지만 국장과 같은 흉례나 가례의 일부 예전은 예전의 관습대로 진행된 측면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순종황제의 국장도 완전히 조선 시대의 예전과 동일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5월 27일에 열린 제4회 국장위원회 회의에 따라 장례 행렬 중에 일본 육해군 의장대의 순서가 첨가되는 등 약간의 변경 사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이상 국장의 주최가 조선 왕조가 아니라 일제 조선총독부였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3) 대한민국 국가예전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국경일 경축행사, 취임식 행사, 국빈영접 행사 그리고 국장․국민장 등 장의의식 등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행해야 하는 예전으로 규정하고 있다. (총무처 1994) 이러한 예전들은 과거 조선시대의 오례체제에 입각한 국가예전과는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 하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ꡔ국조오례의ꡕ의 예전체제가 유교적 의례 규범을 통해 백성들을 교화하는 교육적 의미를 지닌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회적 관계와 제도들의 중심인 왕실의례를 규정한 것이었다면, 이에 반해서 대한민국 국가예전은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의 국체와 이념을 정당화하고 국가적 권위의 원천을 재확인하는 의례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현재의 국가예전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기원이 되는 날을 기념하는 경축의례들, 선거로 선출된 국가 수반인 대통령의 취임의례, 국가나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애도하고 장례를 치르는 국장․국민장 등이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언급해야 할 것은 이러한 국가예전의 일부가 거행되는 의례 공간이면서 동시에 국가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 상징 공간으로서의 국립묘지이다.




① 국경일 경축행사




국경일 경축행사는 1949년 10월 1일에 제정․공포된 “국경일에관한법률”(법률 제53호)에 개국․건국 등 국기(國基)와 관련된 날로 지정된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에 행하는 행사이다. 그러므로 국경일 관련 경축식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근대적 국민국가의 건설에 관련되거나, 한민족의 문화적 역사적 정체성에 관련된 사건들을 기념하는 의례들로서,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을 단일한 근대적 정치공동체의 일원이자 공통된 혈연적․지역적․문화적 전통을 가진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느끼고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실천들인 것이다.

경축행사의 주관처는 국경일의 성격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4대 국경일 중 3․1절과 광복절, 개천절은 정부 총무처 주관으로 거행되며, 제헌절은 1988년부터 국회사무처에서 거행하고 있다. 또한 3․1절과 광복절에는 중앙경축식 외에 광역시나 도 단위의 지방 경축식과 재외공관별 경축식을 거행토록 하고 있으며, 개천절에는 지방 경축식을 생략하는 대신 지역의 실정에 맞는 관련 경축행사를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국경일 경축행사의 진행절차는 거의 비슷하다. 여기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공동체의 두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는 국가와 민족의 기원을 기념하는 광복절과 개천절의 경축식 진행절차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 먼저 광복절 경축행사는 대한민국 총무처 의정과에서 1994년에 발간한 ꡔ정부의전총람ꡕ에 실린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총무처 1994: 75-82), 다음으로 개천절 경축식은 1999년 10월 3일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4331주년 경축식을 TV에 중계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광복절 경축행사>

광복절 경축행사는 “국권의 회복과 자주독립국가의 건립을 경축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의 새시대를 창조하는 위대한 국민정신으로 승화․발전시키기 위하여 거행”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행사의 주관은 대한민국 정부 총무처이며, 매년 8월 15일 오전 10시에 독립기념과 겨레의 집에서 거행하게 되어 있다. 참석하는 사람은 행정, 입법, 사법부 및 헌법기관의 차관급 이상의 주요 인사, 광복회원, 국회의원 및 제헌국회의원, 정당의 주요간부, 각계대표, 주한외교단 등과 자발적으로 첨여를 희망하는 시민으로 되어 있다.

광복적 경축식의 식순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개식 - 팡파르

국민의례

- 국기에 대한 경례(국기에 대한 맹세 포함)

- 애국가 제창(1~4절)

-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기념사 - 광복회장

축가(독창 및 합창)

독립유공자 포상 - 참석주빈

경축사 - 참석주빈

광복절 노래 제창(1~2절)

만세삼창 -국회의장 선창

폐식 - 팡파르

※ 경축사는 대통령, 국회의장, 주한외교단장, 독립유공자 대표가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근래에는 대통령만이 경축사를 하는 것이 통례이다.




한편, 경축식이 끝나면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후정에서 경축연회가 벌어진다. 그리고 경축연회 직후에는 문화관광부 및 독립기념관 주관으로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마당에서 고적대 연주, 사물놀이, 연예행사 등 경축 공연이 실시된다. 그리고 서울시에서는 당일 정오에 보신각 종을 타종하는데 타종인사로는 광복회원 및 독립유공 관련단체인사 중에서 선정하게 되며, 타종회수는 33회로 정해놓고 있다. 또한 광복절 경축행사가 끝난 후에도 후속 행사들이 이어진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국립묘지 참배가 있다. 경축 행사가 있은 뒤 가까운 시일에 재경광복회원은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후손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선열, 즉 무후선열(無後先烈)을 위한 추모제를 지낸다.

그런데 개․폐식곡으로 사용되는 음악인 팡파르는 최근에 와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종래에는 개․폐식 구분없이 군악대에서 사용하던 서양식 팡파르곡을 연주하였다. 그런데 1993년 2월 25일에 있었던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독자적인 한국식 개식곡과 폐식곡을 사용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에 총무처가 음악가 김희조에게 의뢰하여 개식과 폐식으로 구분한 한국형 개․폐식곡을 새로 작곡하여 대통령 취임식 뿐만 아니라 국경일 등 정부 주요행사에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총무처 1994: 95)




<개천절 경축행사>

“한국 민족이 처음으로 고조선이라는 국가를 창건한 날이자, 천자의 아들이자, 고조선 창건자의 아버지인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연 날로 기념되는 것”이 개천절이다. 1999년 행사는 양력 10월 3일 오전 10시에 행정자치부 주관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거행되었다. 간단한 진행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국민의례 (10:00 - 10:10)

- 국기에 대한 경례

- 애국가 제창

-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개국기원 소개 (10:10 - 10:20): 국사편찬위원장

경축사 (10:20 - 10:25): 국무총리

개천절 노래 제창(3절)

만세삼창: 국회부의장

폐식선언 (10: 30)

경축공연




1999년 개천절 경축식에서는 특이하게 여타 국경일 기념 행사에서 양약기로 연주하던 국민의례용 음악과 기념 노래 반주를 모두 국군 취타대와 국악연주단이 연주하였다.




② 대통령 취임식




근대 국가에서 해당 국가의 근간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의례들은 건국과 관련된 사건을 기념하는 것들이다. 가령 프랑스의 경우에는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7월 14일)이며, 미국의 경우에 독립 기념일(7월 4일)이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에는 광복절(8월 15일)과 개천절(10월 3일)이 그러하다. 그런데 한국과 같이 대통령 중심제를 시행하는 국가들에서는 대통령 취임식이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 수반이 새로 권좌에 오르는 것을 나타내는 의례인 동시에, 선거라는 근대적 정치 활동이 초래한 정치 권력의 비결정 상태 또는 공백 상태를 극복하고 새롭게 국가와 정치권력을 재구성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에 해당하는 정치적 사회적 의례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1948년 7월 24일에 있었던 초대 대통령 취임식에서부터 시작하여 1998년 2월에 거행된 제15대 대통령 취임식까지 모두 합쳐서 15회의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그러나 1998년에 거행된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의 예식 절차와 구체적인 진행 과정이 실린 정부의 공식적인 의전 총람이 아직 발간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제14대 취임식까지만 대상으로 다룰 것이다.

그 동안 대통령 취임식의 날짜나 장소도 일정하지 않았고, 취임식순에서도 약간의 편차가 있었다. 그리고 취임식 자체의 성격이 최고 권력자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기존에 정해진 절차를 그대로 반복하기보다는, 무언가 이전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 있음을 더 강조하려는 경향들이 많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편차들은 해당 의례가 지닌 상대적인 정형성과 반복성에 비추어볼 때 그다지 크게 부각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취임식이 거행되었던 장소 및 취임식순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최근, 즉 14대 취임식 이후에 들어서면서 변화된 측면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13대 취임식까지를 전체적으로 개괄한 다음, 1993년 2월 25일에 거행된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의 진행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총무처 1994: 191, 159-175))

지금까지 취임식이 거행된 날짜는 일정하지 않았는데, 초대는 1948년 7월 24일, 2대는 1952년 8월 15일, 3대는 1956년 8월 15일, 4대는 1960년 8월 13일, 5대는 1963년 12월 17일, 6대는 1967년 7월 1일, 7대는 1971년 7월 1일, 8대는 1972년 12월 27일, 9대는 1978년 12월 27일, 10대는 1979년 12월 21일, 11대는 1980년 9월 1일, 12대는 1981년 3월 3일, 13대는 1988년 2월 25일 그리고 14대는 1993년 2월 25일에 열렸다. 대략 초기에는 8월 15일 광복절 경축일에 대통령을 취임식을 함께 거행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유신 정권 하에서는 12월과 7월에 주로 거행되었고, 1980년대 이후에 들어서는 연초인 2월이나 3월에 주로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한편, 취임식이 거행된 장소도 역사적으로 변천과정을 보인다. 즉 초대부터 7대까지의 취임식은 모두 당시 중앙청 정면 광장에서 열렸지만, 유신 정권과 제5공화국 시절의 대통령 취임식이었던 8대부터 12대까지의 취임식은 모두 장충 체육관이 아니면 잠실 실내 체육관 등 체육관에서 행사를 치룬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3대 이후의 취임식은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거행되어 온다.

그러면 이번에는 역대 대통령 취임식의 식순을 살펴보자. 우선 초대 대통령 취임식의 식순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자료로 남아있는 것이 없어 구체적인 예전 절차에 관하여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다행히 2대 이후로는 식순이 남아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찾아볼 수 있다. 모든 대통령 취임식이 엄밀하게 규정된 동일한 형식으로 거행된 것은 아니었다. 약간씩 변경되고 변화된 부분들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식순, 즉 예전의 진행 절차에서 확인할 수 있는 변화란 것은 그다지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말하자면 세부적인 행사 절차에서의 사소한 변경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광복절에 거행된 2대와 3대 취임식에서는 광복절 노래가 식순에 들어 있으며, 2대에는 독특하게 대통령기 증정 절차가 있었고, 3대와 6대부터 12대(10대 제외)까지는 대통령 찬가를 부르는 순서가 있었다. 그리고 4대 취임식까지는 만세 삼창을 하고 예식을 끝냈으나, 이후에는 만세삼창의 순서가 사라졌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면 1993년 2월 25일에 열린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제14대 대통령 취임식>

취임식 전체는 국회의사당 잔디마당에서 거행되었는데, 당일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열린 식전 행사 “기쁜 아침”과 10시부터 시작된 “대통령께 축복을”이라는 주제의 취임식, 그리고 “다 함께 앞으로”라는 식후 행사로 이루어졌다.




A. 식전 행사 - 기쁜 아침

가. 모임 (8:00 - )

- 취임식단 장식

- 전통 기와지붕 모양에 14개(제14대 대통령 상징)의 전통식 배흘림기둥

- 각 시, 군, 구의 이름이 적힌 “화합의 깃발” 260여개 기수단

- 3군의 여단급 이상 부대기 260개로 구성된 “군기단”

나. 기쁜 아침 (8:30 - 9:10)

동요와 민요 중에서 민족과 조국을 주제로 한 16개의 음악 연주

다. 앞마당 (9:10 - 10:00)

- 식장을 정화하고 행사를 준비하여 대통령을 맞이하는 의식

- “전통적인 터씻음 의식”으로 이름붙인 길놀이

- 취타대, 화합의 깃발단, 팡파르단, 군기단, 군악대, 전통의장대, 합주단 입장

- 10시 정각에 의전국악으로 지정된 궁중음악 “만파정식지곡(萬波停息之曲)”의 연주에 맞추어 대통령 입장




B. 취임식 - 대통령께 축복을

가. 개식 (10:00 - )

- 총무처 의정국장의 개식 선언

- 팡파르: 김희조 작곡의 한국적 팡파르곡 사용

나. 국민의례 (10:01 - 10:04)

- 국기에 대한 경례

- 애국가 제창

-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다. 식사 (10:05 - 10:08)

-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는 취임행사위원장의 식사

라. 취임선서 (10:08 - 10:13)

- 취임선서문: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헌법 제 58조)

- 축가

- 축포 21발

마. 취임사 (10:13 - 10: 38)

- 취임사

- 합창: 안익태 곡 “코리아 환타지” 중 마지막 합창 부분

바. 폐식 (10:38 - )

- 폐식선언

- 팡파르

- 궁중음악 “표정만방지곡(表正萬方之曲)” 연주




C. 식후행사 - 다 함께 앞으로

가. 중앙통로 행진 (10:40 - 10:46)

- 취임식장 중앙통로 행진

- 100여명의 3군 군장성 거수경례

- 3군 사관생도, 경찰대학생의 경례, “화합의 깃발단”과 “군기단”의 깃발경례

- 국회의사당 정문까지 행진한 후, 대통령은 청와대로 출발

나. 연도행사 - 국민과 더불어

다. 청와대 환영행사 - 어서 오세요




이상에서 소개한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의 특성을 몇가지로 간추려보자. 먼저 전체적인 절차는 미국에서 사용하는 의전절차와 비슷하다. 즉 의례의 진행 과정에서 취임선서를 핵심적인 절차로 놓은 점이나, 전후에 축하행사가 벌어지는 점, 그리고 취임식을 마치면서 대통령 관저로 이동하여 입주하는 것 등은 대개의 대통령제 국가에서 유사하게 볼 수 있는 의식절차이다. 그러나 취임선서를 기독교 성서에 대고 하지 않는다는 점은 미국의 대통령 취임식과 다른 부분이다.

둘째로, 본격적인 취임식의 시작과 끝에 궁중음악인 “만파정식지곡(萬波停息之曲)”과 “표정만방지곡(表正萬方之曲)”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조선조 왕실이 궁중 의례에서 사용하던 음악이다. 그리고 군악대에 서양식 악대와 더불어 국악 취타대를 함께 편성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런 점들은 궁중음악을 전통문화로 받아들여 이를 현대에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민주 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이 민족사의 역사적 연장선 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상징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공화국의 이념을 표상하는 문화적 자원들을 개발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입장식에서 의장대, 취타대, 깃발단의 입장을 “길놀이”, “터씻음”으로 표현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이런 용어들은 민간의 문화적 관습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으며, 또한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는 민중적 문화전통의 기표로 부각되던 것들이다. 그러므로 제14대 대통령은 군사정권이 아니라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산물로서 이러한 과거의 저항문화들과 친연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둘째 특성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전통사회에서 지배세력의 고급문화였던 궁중음악과 민중들이 향유하던 기층문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민속문화적 요소들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현상이 어떤 논리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는지, 그 문화적 접합의 정당성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설명하는 논리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당대의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새로운 이념들이 부가되었을 뿐, 국가예전의 핵심인 대통령 취임식과 관련하여 전통적 요소와 현대적 요소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를 고려하지 않은 결과로 생긴 것이라 생각된다.




③ 국장․국민장 등 장의의식




장례 의식이 국가 예전 중의 하나로 거행되는 경우에 이를 국장 또는 국민장이라 부른다. 이는 “국가원수의 직에 있었거나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은 자가 서거하였을 경우에 이들에 대한 애도와 경의를 거국적으로 표시하기 위한 예식”(총무처 1994: 449)으로서, 1967년 1월에 제정된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과 1970년 6월에 제정된 “동법률 시행령”에 따라 거행된다. 국장이나 국민장을 시행할 여부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결정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국장과 국민장은 몇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국장은 국가에서 모든 경비를 지불하고 국가의 명의로 거행하는 장례 의식인데, 국민장은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베푸어지며 경비의 일부를 국가가 보조하는 장례 의식으로 규정되어 있다. 또한 국장의 장의기간은 9일 이내이며 국장 기간 동안 날씨와 밤낮에 관계없이 계속 조기를 게양하게 되어 있는 반면, 국민장의 장의기간은 7일 이내이며 국민장 당일에만 조기를 게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장과 국민장은 장례 의식의 행사 주체, 장의 기간 등에서 차이가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의위원회의 구성, 고문의 지명, 집행위원회 기구, 일반국민의 애도표시와 같은 의식에서는 국장과 국민장이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장례 의식의 절차도 국장과 국민장은 모두 영결식․장의행진․안장식의 세가지 의례 내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지금까지 국장의 선례는 1979년에 있었던 전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국장이 유일하다. 한편 국민장은 일반적으로 전직 대통령․국회의장․대통령영부인․국무총리․대법원장 등이 서거하였을 경우에 거행하는 것이 관례이다. 국민장의 선례로는 전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 전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전 부통령 김성수(金性洙), 전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 전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 전 부통령 함태영(咸台永), 전 부통령 장면(張勉), 전 국무총리 장택상(張澤相), 전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전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陸英修)의 국민장과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석준(徐錫俊) 등 순국외교사절 17인의 합동국민장이 있었다.

국장이나 국민장의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유관인사의 사망 사실이 언론보도나 친지 등의 통보로 행정자치부 의정국에 알려지면 기초적인 사실들을 확인하고 장관에게 보고한다. 보고에 따라 국민장 이상의 장의절차를 진행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관계국무위원 간담회가 소집된다. 방침이 결정되면 국무총리의 보고를 바탕으로 대통령이 국장이나 국민장 거행을 재가하게 된다. 이에 따라 즉각 위원장 1인, 부위원장 약간명 그리고 3백명 이상 1천명 이내의 위원과, 위원회의 자문에 응하는 고문 약간명으로 이루어진 국(민)장 장의위원회가 구성되어 장례 의식 전반을 주관하게 된다. 국장의 장의위원장은 대통령권한대행이나 국무총리가 맡게 되며, 국민장은 국무총리가 맡게 된다. 장의위원회는 일간 신문에 장의 내용을 공고하고, 빈소를 마련하여 영결식을 준비한다. 영결식은 주로 중앙청 광장이나 여의도 광장 등에서 거행된다. 참고로 1979년 11월 3일에 거행된 박정희 전대통령의 영결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박정희 전대통령 국장 영결식>

1. 개식 - 조악대

2. 국기에 대한 경례 - 애국가

3. 고인에 대한 묵념 - 조악 (전국민 동시)

4. 약력보고 - 집행위원장

5. 조사 - 장의위원장

6. 종교의식 - 천주교, 기독교, 불교

7. 육성녹음 근청

8. 헌화 - 장의위원장, 유족, 장의고문, 집행위원: 조곡

9. 조가

10. 조총 - 3군 의장대

11. 폐식 - 국립교향악단




국장․국민장의 경우 영결식에서 종교의식은 불교, 천주교, 기독교의 순서(오래된 순서)로 의식을 모두 해온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고인의 종교와 유족의 의사에 따라 다른 종교의식을 추가하거나 집례순서를 변경하거나 일부 종교의식을 생략할 수도 있다. (총무처 1994: 479-480) 그리고 조총이나 조례포(조포)는 축포와 마찬가지로 21발을 발사한다. 조총은 7명이 3열 횡대로 서서 부대장의 구령에 따라 전열부터 한번에 7발씩 3번에 나누어 발사한다. 그리고 조례포는 3초 간격으로 1분에 모두 발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영결식이 끝나면 장지로 이동하여 매장을 하는 안장식이 거행된다. 국장․국민장의 장례 의식을 거행할 경우에 영결식은 국가나 국민의 이름으로 치르는 국가 예전의 성격으로 거행되지만, 안장식은 유가족의 의사를 존중하여 종교의식 또는 나름의 지방적인 관습방식에 따라 거행하게 된다. 또한 안장식의 준비는 국립묘지에 안장할 경우에는 국방부가, 그리고 지방 선영 등에 안장할 경우에는 안장지 지방자체단체장이 하게 된다. ꡔ정부의전총람ꡕ에 기재된 안장식의 절차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인 안장식순

1. 개식

2. 고인에 대한 경례

3. 종교의식(불교, 천주교, 기독교)

4. 헌화 및 분향

5. 하관

6. 허토

7. 성분

8. 조총

9. 묵념 (진혼나팔)

10. 폐식




기독교의식의 경우

1. 개식

2. 묵기도

3. 찬송

4. 기도

5. 성경봉독

6. 찬송

7. 축도

8. 조총

9. 진혼나팔

10. 폐식




④ 국립묘지




일반적으로 죽은 이를 매장해 놓은 곳인 묘지는 죽음을 대하고 이를 순화시키려는 인류의 오랜 노력과 결부되어 있는 공간이다. 즉 죽음을 어떤 식으로든 의미화하고 그렇게 의미화된 죽음을 살아 있는 자와의 관계 속에서 재정위하려는 상징적인 노력들이 묘지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근대 사회가 수립되기 이전 시기에 묘지의 공간은 대개의 경우 기독교나, 불교, 유교, 혹은 민간신앙과 같은 특정한 종교 전통과 종교적 관념에 의해 의미화되고 규정되었다.

이에 반해 근대 시민사회에서는 특정 종교가 관리하는 종교 묘역은 계속 유지되는 한편, 이과 더불어 세속적인 성격의 공동묘지가 생겨나게 되었다. 즉 국가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특정한 공간을 지정하여 죽은 자들을 매장하고 그 후손들이 기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바로 공동묘지이며, 이는 세속 국가가 죽음을 관리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단순히 죽은 이를 안장하고 기념하는 사적인 공간으로서 공동묘지 이외에 근대 국민국가의 이념과 관련하여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묘지가 아울러 발생하였다. 이른바 국립묘지(National Cemetery)가 그것이다. 국가나 민족을 위해 순국한 이들을 국가에서 안치하여 관리하는 공적인 공간인 국립묘지는 민족이나 국가의 이름을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이들을 “순국선열” 혹은 “호국영령”이라는 이름으로 모셔두고 이들을 추념함으로써 살아 있는 이들 즉 국가 공동체나 민족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국가나 민족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그 속에서 개인의 존재를 의미화하는 기능을 한다.

물론 국립묘지 자체가 국가 예전인 것도 아니고 국립묘지에서 거행되는 행사들이 자동적으로 국가 예전으로 간주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케서린 벨(Catherine Bell)이 지적하였듯이, 특정 의례가 의례로서의 성격을 드러내고 의례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은 의례에 대한 규정집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일상적인 삶이 유지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체적인 의례로서 등장하는 과정, 즉 의례화(ritualization) 과정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국립묘지는 각종 국가 예전, 특히 국장․국민장의 장의의식 중 안장식이 거행되는 장소이자, 외국 정상과 같은 국빈들이 방문국의 국가적 전통에 경의를 표하는 의식으로서 방문하여 헌화하는 국가적인 장소이다. 그러므로 국립묘지는 “민족의 성역”이라고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각종 국가 예전들과 밀접히 연관을 갖고 있는 매우 상징적인 장소이다.

한국의 국립묘지는 모두 세곳이다. 첫번째는, 1955년 국군묘지로 창설되었다가 1965년에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대한민국 국립묘지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동작동 국립묘지이다. 두번째는 동작동 국립묘지의 안장능력이 곧 한계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어 1974년부터 준비하여 1979년에 창설된 대전 국립묘지로 1986년 이후의 영령들이 영면하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국립묘지는 1997년 대통령령 제15360호에 따라 국립묘지로 지정된 수유리 국립 4․19묘지이다. 앞의 두 국립묘지는 1996년에 관리기관의 명칭이 “국립묘지관리소”에서 “국립현충원”으로 개명됨에 따라 현재는 각각 “국립 현충원”과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면 이하에서는 세 국립묘지 중에서 현대 한국인들의 뇌리에 가장 깊숙히 각인된 국립묘지인 동작동 국립묘지를 중심으로 국립묘지의 상징성과 예전적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자.

동작동 국립묘지가 자리한 지역은 관악산 줄기에서 뻗어나온 공작봉을 주봉으로 하여 동작산의 능선이 병풍처럼 3면을 감싸고 앞으로 한강이 굽이쳐 도는 곳으로 총 면적은 대략 43만여평이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조선조 단종에게 충절을 바쳤던 사육신(死六臣)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六臣祠)가 있던 곳이라고 전한다. 풍수지리설에서도 ‘동작포란형(銅雀抱卵形)’이라 하여 동작이 알을 품고 있듯이 상서로운 기맥이 흐르는 명당으로 일컬어진다.

국립묘지의 정면에 들어서면 충성분수탑이 서 있고, 금잔디가 깔린 광장을 지나 현충문과 현충탑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 현충탑 안에는 11만여 무명용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위패실과 납골당이 있으며, 이를 가호하고 있는 애국투사상이 좌측에, 호국영웅상이 우측에 있다. 이 현충탑을 중심으로 동서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 구도를 보면, 먼저 일반 묘역과 특수 묘역으로 나뉘어진다. 일반 묘역에는 ① 영관이하 묘역, ② 경찰 묘역, ③ 육탄10용사 묘역, ④ 학도의용군 묘역, ⑤ 재일학도의용군 묘역에 5만 4천여위가 안장되어 있다. 그리고 특수 묘역에는 ① 충열대, 독립운동 중에 순국하여 후손이 없거나 시신을 찾지 못한 선열의 위패를 봉안한 ②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 ③ 임시정부요인 묘역, ④ 애국지사 묘역, 3명의 외국인을 모신 ⑤ 외국인 묘소, ⑥ 국가유공자 묘역, ⑦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 묘소, ⑧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묘소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국립묘지에서 중심적인 상징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충의와 위훈을 추앙하고자 세워졌다는 현충탑이다. 그래서 “현충탑은 민족의 성역인 국립묘지를 상징하고 있다”는 식으로 의미화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탑 내부에는 6.25전쟁 당시 전사자 중 시신을 찾지 못한 10만 2천명의 위패와, 시신은 찾았지만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5천 7백여명의 유해를 모셔두고 있다.

이 현충탑은 한국을 공식적으로 방문하는 외국의 국가 원수와 귀빈들도 이 곳을 참배하게 되며,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거나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참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아마도 특정 개인의 묘비가 아니라 집단적인 묘비일 뿐더러 그곳에 봉안된 영령들도 그 이름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한 해석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인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국민국가의 정신을 반영하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앤더슨의 표현대로 “이 무덤들은 주인을 알아볼 수 있는 유물이나 불명의 영혼이 없어도 기괴한 민족적 상상물들로 가득차 있다.” (앤더슨 1991: 25) 그러므로 현충탑은 국립묘지에 안장된 모든 영령들을 대표하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를 갖게 되면서, 동시에 그 특정한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 상상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4) 한국 국가 예전의 특성과 평가




지금까지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가예전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현재적 모델이 어떤 모습인지 과거의 국가예전과 비교하기 위해서 조선시대 왕실의례로 사용되던 국가예전인 ꡔ국조오례의ꡕ의 의례체제를 소개하였고, 조선시대 왕실 의례가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예전으로 변모하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개항기와 일제시기에 국가예전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였는지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사용되고 있는 국가예전의 모습과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서 경축일 기념 의례, 대통령 취임식, 국장․국민장의 장의의식, 그리고 국가예전의 일부가 거행되는 의례 공간이자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과 깊은 관련을 지닌 상징 공간으로서 국립묘지 등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현대 한국의 국가예전이 지닌 특성을 한마디로 개념화한다면 근대 모델로의 이행이라 할 수 있다. 즉 ꡔ국조오례의ꡕ의 유교적이고 왕실 중심의 의례체제가 개항기와 일제시대에 과도적 혼합기를 거쳐서 완전히 소멸하고 문헌 텍스트에만 남게 되었으며, 대한민국 건국 때부터 새로운 근대적인 국가예전이 성립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이 탄생한 공화국의 이념을 담아내는 독자적인 의례 모델을 개발하여 국가예전으로 완성하였다기보다는 건국 과정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미국식 예전들을 그대로 사용하되 일부의 내용만을 수정한 채 국가예전으로 편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지적할 사항은 국가예전의 의례절차에서 사용되는 의례적 요소들의 상징성이 일관되게 짜여져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가령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하여 민족과 국가의 기원을 단군에 두고 있으면서도 애국가에서는 이러한 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1883년 고종에 의해 왕명으로 제정․공포된 국기인 태극기의 태극과 사괘 문양도 역시 다른 국가적 상징물들과 연관성이 없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설명도 없이 봉황을 대통령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역시 의문시된다. 그러므로 향후 현행 국가예전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이러한 점들은 점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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