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마당

역사칼럼

문화재 보호에 앞장서는 국민

후백제를 세운 견 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2 17:08 조회11,474회 댓글0건

본문


<b>견 훤 (甄 萱) <br>
■ 867∼935 <br>
■ 후백제의 건국자 <br>
■ 재위 892∼935 </b><br><br>
▶지렁이의 정기를 받은 탄생<br>
본래 성은 이(李)씨이었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 지금의 문경)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이비가기 李碑家記》에서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다.
<br>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전해질 뿐이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 용개(龍蓋), 보개(寶蓋), 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br>
그런데 《고기 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그를 낳았다고 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br><br>
▶ 후백제 건국<br>
자랄수록 체모가 남달리 뛰어났다. 뜻을 세우고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비장(邊方裨將)이 되었다. 이때의 신라왕실은 그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고, 지방의 호족들은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은 몇몇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 기강이 크게 문란해진 데다, 기근마저 심하여 백성들은 유랑생활을 하거나 초적(草賊)으로 봉기하기가 일쑤였다.<br>
이런 상황에서 견훤이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전라도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br>
그후 스스로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 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兼 御史中丞上柱國 漢南郡開國公 食邑二千戶)라고 칭하고,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의 적수 양길(梁吉)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리는 등 세력을 확장을 도모하였다.<br>
900년(효공왕 4)에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에 순행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라 칭하였으며,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다.<br><br>
▶ 고려 왕건과의 세력 다툼<br>
이듬해에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910년(효공왕 14)에 왕건(王建)이 나주를 정벌하려 하자, 보병과 기병 3,000을 거느리고 이를 포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그뒤, 왕건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자, 견훤은 일길찬(一吉飡) 민극(閔)을 파견하여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때의 고려와 후백제는 잦은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br>
920년(경명왕 4)에 견훤은 보병과 기병 1만인으로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 지금의 청도)으로 옮겼다. 이에 신라 경명왕은 김율(金律)을 고려에 파견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924년(경애왕 1)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파견하여 조물성(曹物城: 지금의 안동, 혹은 상주 부근)을 공격하였으나, 성 안의 병사들이 굳게 지키므로 이기지 못하였다.
<br>
이듬해 왕건과 화친하고 서로 인질을 교환하여 화해를 맺었다. 그러나 볼모로 간 진호(眞虎)가 925년에 고려에서 병으로 죽자, 왕건이 보낸 볼모 왕신(王信)을 죽이고 군사를 내어 고려를 공격함으로써 일시적인 화해는 곧 깨졌다. <br>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하여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여 대항하고자 하였다. 이에 927년 근품성(近品城: 지금의 상주)을 공격하고,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영천)를 습격하였다. 이어서 경주로 진격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의 족제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다. 이 소식을 듣고 왕건이 달려왔으나, 왕건마저도 공산(公山)싸움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듬해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를 공격하여 300여인을 죽이고, 또 부곡성(缶谷城: 지금의 군위)을 공격하여 1,000여명을 참살하였다. <br><br>
▶ 아들의 배반과 왕건에의 의탁 <br>
막강하였던 견훤의 세력은, 929년(경순왕 3)의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8,0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패전으로 점차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932년에는 충실한 신하였던 공직(直)이 고려에 투항하는 불행까지 겹쳤다. 이 무렵에도 예성강(禮成江) 어구에 침입하여, 100여척의 전함을 불태우고 3백여필의 말을 잡아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934년 운주(運州)를 공격해 오히려 크게 패하였다.<br>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10여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서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에, 금강의 형인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등은 이를 알고 근심하며 지내다가, 양검을 강주(康州: 지금의 晉州) 도독으로, 용검을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 도독으로 삼고, 신검을 홀로 그의 곁에 두자, 이에 신검은 이찬(伊飡) 능환(能奐)으로 하여금 사람을 강주, 무주 등으로 보내어 음모를 꾸몄다. 그리하여 935년 3월에 견훤의 넷째 아들 금강은 신검에게 죽임을 당하고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당하였다.<br>
금산사에 석달 동안 있다가 그해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에 사람을 보내어 의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건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맞이한 뒤,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보(尙父)의 지위와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br>
그뒤 후백제는 점차 내분이 생겨 왕건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이어 신검, 양검, 용검 등은 한때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얼마 뒤에 모두 살해되었다. 견훤 또한 우울한 번민에 쌓인 생활을 하다가 드디어는 창질이 나서, 연산(連山) 불사(佛舍)에서 죽었다.<br><br>
▶ 정치가로서의 자질과 한계<br>
정치가로서의 특징은 일찍부터 외교면에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상당히 긴 직함도 외교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고, 또 925년에는 후당(後唐)에 들어가 번병으로 칭함으로써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중국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어내었다.
<br>
그 이듬해에는 중국의 오월(吳越)과 교류하였으며, 927년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 마돌 등 35인이 당도하자 견훤은 이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장군 최견(崔堅)을 보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登州)에 이르렀으나 모두 잡혀 죽었다. 그러나 거란(契丹)과의 연결은 고려를 배후에서 위협할 수 있었다. 또 922년과 929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br>
견훤은 이처럼 국제관계의 변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서남해안의 비장으로 있으면서 얻은 경험에 의한 것이다. 또, 이 지역은 이미 장보고에 의하여 중국과의 무역이 크게 성행하였고, 또 당시 지방호족들이 중국과 사무역(私貿易)을 빈번하게 행하던 곳이었다.
<br>
후삼국의 쟁패 과정에서 왕건에게 패한 것은 쇠망하여 가는 신라의 관리로서 출발한 세력기반을 가졌기 때문이다. 지방에 확실한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고, 군인으로서 변방에 파견되어 이미 해이해진 신라의 군사조직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흡수했다. 기성사회에서 권력을 잡고 난 뒤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신라와 똑같은 방식의 권력구조를 강화하려 했다. <br>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지방호족이 중심이 되어 신라의 국가체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즉, 후백제 건국 뒤에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역행하고 있어 후삼국의 통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7-28 13:4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