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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의 전술가 - 강감찬(姜邯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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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2 17:08 조회9,9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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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강감찬(姜邯贊) <br>
■ 948(정종 3)∼1031(현종 22) <br>
■ 고려의 명신 <br>
■ 본관은 금주(지금의 여흥) <br>
■ 어려서 은천(殷川)이라 불림</b><br><br>
▶ 관 력 <br>
경주로부터 금주에 이주 해 호족으로 성장한 여청(餘淸)의 5대손이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삼한벽상공신 (三韓壁上功臣)이 된 궁진(弓珍)의 아들이다.<br>
983년(성종 3)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이 되었다. <br>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br>
이듬해에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내고,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였다. <br>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br>
그러자 그해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이에 그는 서북면행영도통사 (西北面行營都統使)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도처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br><br>
▶구주대첩 <br>
구주에서의 대첩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br>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고려의 20만대군은 안주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 지금의 義州 威遠面)으로 나가 정예기병 1만2000명을 산기슭에 잠복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br>
그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으며, 구주에서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침입군 10만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br><br>
▶구주대첩, 그 후 <br>
그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지금의 義興)까지 마중을 나와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br>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 門下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開國男 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 (特進檢校太傅 天水縣開國子 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br>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 (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縣開國侯 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br>
그는 비단 거란과의 항전장으로서뿐만 아니라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주장하여 국방에 대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br>
현재 그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현종묘정에 배향되고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 (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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