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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고구려를 세운 미륵불 - 궁예(弓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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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5-08-02 17:07 조회8,0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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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궁예(弓裔) <br>
■ ?∼918 <br>
■ 후고구려의 건국자·왕<br>
■ 재위 901∼918<br>
■ 성은 김씨</b><br><br>

▶ 애꾸눈이 된 사연<br>
아버지는 신라 제47대 헌안왕이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궁녀이다. 제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 하기도 한다.<br>
그의 탄생설화에 의하면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일관(日官:길일을 가리는 일을 맡아보는 벼슬)이 말하기를 단오날 태어났으며,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한 빛까지 나타나므로, 그는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믿고 죽일 것을 명하자, 사자가 그 집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때 유모가 다락 밑에 숨어 아이를 받았으나,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려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br>
이것은 그가 신라왕족이었으나 왕실의 내분으로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뒤 궁예는 유모에 의하여 키워졌으며, 세달사(世達寺)에서 출가하여 선종(善宗) 이라 하였다.<br><br>
▶ 초기의 세력기반<br>
당시 신라왕실은 극도로 쇠약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들고일어났으며, 흉년까지 겹쳐 국고는 바닥이 나고야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자 889년(진성여왕 3)에는 바닥난 국고를 메우기 위한 방편으로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게 하였다. 가난으로 찌든 극한의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을 감당할 수 없게되자, 떠돌아 다녀야 했으며 남의 농작물을 훔치는 좀도둑(草賊:초적)으로 변하였다.
<br>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는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다.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여 뜻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기훤이 대우해주지 않자, 이듬해 다시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br>
양길의 부하로 들어간 궁예는 양길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지금의 영월)·울오(鬱烏: 지금의 평창)· 어진(御珍:지금의 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이르렀는데, 그 무리가 3,500명이나 되었다.<br>
궁예는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여 자기 세력기반으로 삼았고, 이들에 의하여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저족(猪足:지금의 인제)·생주(지금의 화천)·부약(夫若:지금의 금화)·금성(金城)·철원(鐵圓) 등을 점령하자, 군세가 매우 강성해져 패서지역(浿西地域)의 무리들이 항복하여 왔다. 이에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다.<br>
896년경 임진강 연안을 공략하여 개성에 있던 왕건(王建)부자의 투항을 받고, 승령(僧嶺:지금의 장단 북쪽, 토산 남쪽)·임강(臨江:지금의 장단)·인물(仁物:지금의 기풍군 풍덕) 등 여러 현을 점령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암(孔巖:지금의 양평)· 금포(黔浦:지금의 김포)·혈구(穴口:지금의 강화) 등을 복속하였다. 이때 궁예의 세력권 남쪽인 국원(國原:지금의 충주) 등 30여성을 취한 양길이 궁예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패망하고 말았다. <br><br>
▶ 가사 장삼에 왕관을 얹다. <br>
899년(효공왕 3)에는 송악궁을 수리(修理)하고 왕건을 보내어 양주·견주(見州)를 복속하고, 그 다음해에도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 지금의 화성군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지금의 괴산) 등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왕건에게 아찬(阿飡)의 벼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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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년에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으며,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그해 7월 청주인 1천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에 서울을 정하고 상주(尙州) 등 30여현을 얻으니, 공주장군 홍기(弘寄)가 투항하여왔다. <br>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긴 궁예는 연호인 무태를 ‘성책(聖冊)’으로 고치고 패서의 13진(鎭)을 평정하였으며, 평양성주 금용(黔用)이 투항하여왔다. 그 뒤 궁예는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할만큼 세력이 강성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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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년에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이해에 왕건으로 하여금 해로로 금성(錦城)을 점령하도록 하고, 이를 나주라 이름하였다. 왕건이 거느린 해상세력에 의하여 나주정벌이 이루어져 궁예가 해상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고, 견훤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br>
913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라 고쳤다.<br><br>
▶'태봉'과 함께 사라진 미륵불<br>
궁예는 자신의 세력이 커지자 호화 사치를 일삼았다. 그리고 점점 교만해져서 거칠고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에 그를 따르던 많은 신하와 백성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br>
한때의 세력가였던 궁예는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에 의하여 918년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변복차림으로 도망하다가 부양(斧壤:지금의 평강) 에서 백성에게 피살당하는 불운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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