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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제 1부 포악했던 왕, 업적을 남긴 왕-세조의 큰아들 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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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5-23 13:57 조회8,2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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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큰아들 의경


세자가 갑자기 요절하자, 해양대군이 세자가 되었어. 이때 해양대군의 나이가 아홉이고 세조는 마흔을 갓 넘긴 상태였어. 세조는 자신의 건강은 매우 좋았기 때문에 자신이 군국을 그대로 유지한 채 세자의 왕자 수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한다면 결코 다른 일은 벌어질 리가 없었다고 믿었지. 어쨌든 해양대군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세자에 책봉되어 세조의 승하 후 즉위한 예종이야.

 세조는 세자의 나이가 열 하나가 되자 성혼을 시키고자 했어.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통을 잇기 위해서였지. 또 세자빈이 간택되고 가례를 올림으로 써 이제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할 나이인 세자의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했던 거야.

 그래서 세조는 효령대군 보, 판내시부사 전균, 도승지 유자운 등에게 명해 사제에 돌아다니면서 처녀를 간택하도록 했지. 그래서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하게 돼. 그리고 세자에게 더할 수 없이 기쁜 일이 생겼지. 그것은 사실 세자뿐만이 아닌 세조에게도 마찬가지였어. 바로 세자빈 한씨가 원손을 잉태한 거야.

 원손을 잉태하고 있는 세자빈은 산달이 가까워지고 있어 조심스러웠어. 왕실에서는 세자빈의 심신을 안심시킬 수 있도록 다른 곳으로 옮겨 몸조리를 시키며 각별히 신경을 썼어.

 그래서 그토록 고대하던 원손이 태어나게 돼. 하지만 워낙 난산이고 세자빈의 몸이 허약해져 있던 터라 마냥 기쁨에 차 있을 수 없었어. 얼마 지나지 않아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어. 세자빈은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로 아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거든.

 그녀의 죽음은 세자와 세조, 아버지인 한명회를 슬픔에 잠기게 했어. 이듬해 세자빈의 상레를 치르고 장사를 지냈어. 그녀는 예종이 왕위에 오른 뒤 장순왕후로 추존되지. 하지만 세조 집안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세 살이 된 원손이 풍질을 앓게 됐어. 그래서 세조는 호조참판 임원준, 동지중추원사 전순의를 불러 모았어. 그리고 원손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지만 소용없었어.

 원손의 병이 이미 손을 쓸 시기가 지날 정도로 갑자기 악화되었거든. 결국 원손도 할아버지인 세조와 아직도 미소년 티가 남아있는 예종의 곁을 떠나게 된 거야. 세조로서는 장자인 의경세자와 장손인 원손을 일찍 잃게 되었으니 그 슬픔은 말할 나위가 없었을 거야. 세조는 죽는 날까지 ‘수양 숙부 나를 살려 주시오’ 하는 단종의 소리가 또렷이 떠올라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해.

 그래서 세조는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불교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어. 사찰을 궁궐 안에 두어 승려의 목탁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했지. 병이 점점 깊어지자 금강산 깊은 골짜리게 들어가 병을 고치고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 했으나 병은 점점 깊어만 갔어. 그리고 세조의 나이 52세 되던 어느 날 세상을 떠났어.

 부왕의 죽음은 온순하면서도 효성스러웠던 예종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그는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쳤다는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 있어.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에 있어 한 잠도 못잔 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감에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어 이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예종도 결국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거야. 그때가 예종 나이 불과 스물이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모든 일들을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인과응보의 결과라고 수근댔지. 정말 사람은 죄 짓고는 편히 살지 못한다는 걸 이제 알았겟지.

출처: 박찬희 엮음, <조선왕조 오백년야사>, 꿈과희망, 20-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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