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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제 2부 업적을 많이 남긴 왕들-학자에게 수달피 웃옷을 벗어 덮어준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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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5-24 09:45 조회7,5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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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에게 수달피 웃옷을 벗어 덮어준 임금


세종대왕은 우리역사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위인이지. 그 시대에 이룬 업적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 그래서 세종대왕은 조선왕조의 왕 중에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된 건지도 모르겠어. 세종이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어. 집례, 제도를 정비하였지. 그리고 겨례 문화를 높이는 데에 기본이 된 훈민정음의 창제, 방대한 편찬 사업,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했어.

 그리고 세종은 무엇보다 널리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국민을 본위로 한 왕도 정치를 베푼 임금이었어. 세종은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고,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대. 정사를 보살피면서 독서와 사색에 머리쓰기를 쉬지 않았고, 의지가 굳어서 옳다고 생각한 일은 반대가 있더라도 기필코 실행했지.

 세종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세종은 학문을 좋아했는데 새벽에 일어나면 정당에 나가기 전까지 꼭 독서를 했어. 그런데 어느 날 밤이 이슥한 후 세종은 내시를 보내 집현전 학자 중 오늘 누가 숙직하며 글을 읽고 있나 보고 오라는 명을 내렸어. 내시는 어명을 받들고 집현전에 이르러 살펴보니 신숙주가 독서를 하고 있었어. 내시는 신숙주가 홀로 독서하고 있음을 세종에게 아뢰었지.

 세종은 신숙주가 신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신장도 글을 잘 하더니 아들도 역시 공부를 열심히 하는구나. 부전자전이로다.” 하며 감탄했어. 그리고 내시를 시켜 또 다시 신숙주를 보고 오라고 했어. 그런데 여전히 신숙주는 자지 않고 글을 읽고 있었던 거야. 밤이 깊자 세종은 직접 집현전을 찾아갔어. 그리고는 단정히 앉아 글을 읽고 있는 신숙주를 몰래 지켜봤지. 그러던 중 신숙주가 고단하여서인지 꾸벅꾸벅 졸다가 책상에 엎드린 채 그대로 잠이 들었어. 그 모습을 지켜본 세종은 살그머니 들어가 자기가 입고 온 수달필 웃옷을 벗어 신숙주의 등 위에 덮어주고 나왔어.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선비를 아끼는 따뜻한 일이 었지. 신숙주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잠에 깊이 빠졌어. 아침에 수달피 웃옷을 보고 깜짝 놀란 신숙주는 간밤에 세종이 왔다 갔다는 소리를 듣게 됐어. 신숙주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 이러한 소문이 궁중에 퍼지게 됐고 그때부터 선비들은 감격하여 독서에 열중했대.

 세종 때 집현전에서 좋은 책이 많이 나온 것과 훈민정음의 창제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야. ‘집현전’은 세종대왕의 명으로 1420년에 설립된 왕립 연구 기관이야. 세종은 젊고 재질이 있는 사람을 뽑아 집현전에 배치하고, 문과에 급제한 가장 재능 있는 관리들 가운데 훌륭한 학자들을 모아 왕실 연구가관으로 만들었어. 집현전이 존재했던 36년 동안 총 약 90명의 관리들이 그곳에서 일 하였는데, 서거정, 성삼문, 신숙주, 양성지, 정인지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어. 집현전은 궁궐 내의 위치에 있었고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의 이해와 해결 방안을 물었지. 집현전은 임금의 자문기관이자 국가 제도 및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이었어.

 세종은 집현전을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손질하고, 많은 책을 구입하여 서가에 정리하여 학자들이 책을 찾고 보기에 편하게 했어. 집현전에 나오는 학자들은 아침 일찍 나와 저녁 늦게 돌아 갔고 어떤 학자들은 새벽 첫닭 소리를 듣고야 잠자리에 들기도 했지. 학자들은 세종의 명을 받아 여러가지 사상, 역사를 비롯하여 천문, 지리, 의약 등을 마음껏 연구하였으며 경비는 모두 나라에서 부담했어. 집현전이 존재한 36년 동안 그곳에 속한 학자들은 수많은 중요한 문화적 업적들을 이루었지. 그 중 최대의 업적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훈민정음’ 창제일 거야. 세종은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나타내지 못하는 것을 늘 안타깝게 여겼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한자를 사용해 왔어. 중국의 문자인 한자는 글자마다 뜻을 알아야만 쓸 수 있기 때문에 익히기도 어려웠고 쓰기에도 매우 불편했지. 그래서 일부 계층에서만 사용했어. 그래서 세종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만물은 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글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야. 세종은 글을 모르는 무지한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우리 글자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 한 거지.

 세종은 집현전에 모아 기른 인재들 가운데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 이개, 이현로, 성상문 등을 궁중의 정음청에 따로 모아 보좌를 받으며 한글 만들기를 주도했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드디어 세종 25년(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햇어. 세종은 ‘훈민정음’의 앞부분에서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이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한다.”
고 훈민정음을 만들게 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자음과 모음 28자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우리말을 소리 나는 대로 쓸 수 있게 했다는 거야. 그래서 훈민정음은 일반 백성들도 쉽게 배울 수 있었지. 1443년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어.

 “상감께서 언문 스물여덟 자를 친히 만드시었다.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본받았다. 초성(첫소리), 중성(닿소리), 종성(받침)으로 나누는데, 이것을 합치어 글자를 이룬다. 모든 문자(한자)나 우리나라 말을 다 이 글자로 기록을 할 수 있다. 비록 글자가 간결하나 전환(돌려쓰기)이 무궁하다. 이 글자를 ‘훈민정음’이라 한다.”

 훈민정음을 반포한 뒤 세종은 궁궐 안에 ‘정음청’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을 연구하고 널리 보급시킬 계획이라고 밝혔어.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참여한 학자들도 “여진, 몽고, 일본 등이 모두 자기 나라의 글자를 가지고 있는데 조선만 우리 글자가 없었다”고 이야기하며 훈민정음 반포를 계기로 우리 문화가 더욱 발전할 것으로 기대했어. 그런데 훈민정음이 일반 백성에게 보급되기까지 그리 순탄하지 만은 않았어.

 최만리 등의 학자는 중국과 다른 문자를 쓰는 것은 시대의 예에 어긋나는 행위고, 성인의 학문인 한자를 배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지. 만일 그렇지 않으면 세상 일이 어둡게 된다며 훈민정음 반포와 실시를 반대했어. 그 대신 강력하게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누누이 타이르고 새로 만든 정음을 자세히 설명했지.

“28자는 무궁하게 활용할 수 있고, 간결하면서도 간편하여 널리 쓸 수 있다. 총명한 사람이면 한나절이면 다 알 수 있고, 둔한 사람도 열흘 정도면 제대로 배울 수 있다.”

 그래도 반대가 너무 심해 세종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의금부에 하루 동안 가두어 두었지. 이런 과정을 거쳐 훈민정음이 반포되게 된 거야. 1443년 만들어진 한글은 3년간 다시 다듬어지고 몇 가지 문헌을 한글로 만드는 실용의 시험을 거쳤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시험해 보는 한편,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의 본문을 풀이한 ‘해례서(解例書)’를 편찬하게 했지. 이런 과정을 거쳐 1446년에 이르러 비로소 ‘훈민정음’이 전국에 반포되었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의의는 두 가지로 요양해 볼 수 있어. 첫째 한자는 중국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이므로 우리말을 적는 데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우리 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새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이야. 여기에는 민족 자주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어.

 둘째는 ‘어린(어리석은) 백성’이란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한자를 배울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민본정신이 배어 있다는 점이지.

 집현전의 훈민정음 창제 외에도 수없이 많은 책을 만들어 우리나라 문화 사상 황금시대를 이룩했어. 집현전 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수십 가지의 편찬 사업 중에는 농업, 유교사상, 역사, 지리, 법률, 언어학 및 의학에 대한 다양한 것들이 있었어.
『농사직설(1429)』, 『태종실록(1431)』, 『삼강행실도(1432)』, 『팔도지리지(1432)』, 『향약집성방(1433)』, 『동국정운(1447)』, 『사서언역(1448)』, 『고려사(1451)』 등이 모두 이때 나온 책이야.

 하지만 세종 이후 집현전의 역사는 세종의 개인적 후원이 그것의 성공에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보여 주고 있어. 세종의 후계자인 문종의 죽음과 그의 손자인 단종의 즉위 이후에 집현전은 오히려 정치적인 역할을 맡게 돼버렸지.

 1455년 단종의 숙부인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항하여 어린 왕을 수호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어. 그 결과 많은 탁월한 학자들이 죽음에 이르렀고 세조는 집현전을 폐쇄해 버려. 15세기 후반에 성종이 ‘홍문관’이라는 명칭으로 집현전을 부활시키려고 시도했지만 그 이전의 영광을 결코 다시 얻지는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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